- 그때 마치 그런 저를 위해 써준 것처럼 다가오는 문장을 만났습니다.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의 『유한계급론』 8장에서 가져왔습니다.

  "보수주의는 상층계급의 특징이기 때문에 품위가 있는 반면, 혁신은 하층계급의 현상이기 때문에 저속하다.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사회적 혁신을 외면하게 만드는 그 본능적 반발과 비난의 가장 단순한 요소는 사물의 본질적 비속성(vulgarity)에 대한 이 관념인 것이다. (…)"

 

- 그러면 이제 공부의 다른 측면인 글쓰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글쓰기는 뭐냐? 내가 가치있다고 여기는 정보, 옳다고 믿는 생각,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을 문자로 표현하는 일입니다. 글쓰기는 공부한 것을 표현하는 행위인 동시에 공부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문자 텍스트로 표현하기 전까지는 어떤 생각과 감정도 내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그 모든 것은 문자로 명확하게 표현해야 비로소 내 것이 된다는 겁니다.

 

- 구사할 수 있는 어휘의 양이 생각의 폭과 감정의 깊이를 결정합니다. 자기 자신과 인간과 사회와 역사와 생명과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이해의 수준을 좌우합니다. 어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괴상한 편견이 있더군요. 풍부한 어휘를 구사해 논리적이고 실감나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아요. 말을 잘하는 사람은 믿기 어렵다는 겁니다. 반면 지극히 단순한 어휘를 반복 사용하면서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어렵도록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말하면 '간결어법'이라고 칭찬합니다. 생각이 얕고 감정이 메말라서 할 말도 적고 표현하는 능력도 없는 사람을 두고 '말이 적고 진중하다'고 하죠. 저는 이것이 일종의 '반지성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는 '말 같잖은 말'이 통용되기까지 합니다.

 

- 어휘를 늘리는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 독서입니다. 글쓰기를 주제로 한 모든 강연에서 저는 이것을 강조합니다. 『토지』『자유론』『코스모스』『사피엔스』『시민의 불복종』처럼 풍부하고 정확한 어휘와 명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한 책을 다섯번 열번 반복해서 즐기며 읽는 거예요. 읽고 잊고, 다시 읽고 잊고, 또 읽고 잊어버리고, 그렇게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끝없이 집을 지을 수 있는 건축자재를 끌어모으게 됩니다.

 

- 자식 기르는 부모로서 제가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이 왜 있느냐? 세상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가르쳐주려고 자식이 있는 거랍니다. 공부를 잘하든 그렇지 않든 다 그렇다는군요. 고마운 분들이지요! 그렇습니다. 우선 이렇게 생각하면서 아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줄 수 있고 해주어야 하는지 부모로서 고민해야 합니다. (…) 그건, 부모가 열심히 공부하면서 사는 겁니다. 아이들이 배우기를 바라면서 말이죠.

"우리가 너를 너무 늦게 낳은 탓에 오래 함께 살아줄 수가 없고, 그래서 너는 부모 없이 살아야 하는 시간이 길다. 미안하지만 열심히 좀 해야겠다. 살벌한 경쟁사회에 던져놓아서 더 미안한데, 별로 의미없어 보이는 내용이라고 해도 삼년만 꾹 참고 남들 하는 것처럼 공부하면 안 되겠니?"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고등학교 들어간 후로는 몰라보게 열심히 합니다.

 

- 인문학도들은 인간의 본성과 삶의 의미를 알고 싶어서 온갖 고전을 읽습니다. 지금도 지식인들이 청소년들한테 그런 책을 권하고 있죠.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공자, 맹자, 노자, 장자, 칸트, 프로이트, 맑스, 니체, 뭐 그런 '위대한 철학자'들이 쓴 책 말입니다. 물론 이런 분들이 나름대로 인간과 삶의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여러 해답을 들려줍니다. 그런데 명백한 한계가 있어요. 그 모든 대답이 관찰과 사색에서 나왔다는 것이죠. 그들은 인간이 '물질적으로'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관찰로 얻은 빈약한 정보를 토대로 인간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가설을 세웠다는 말입니다.

 

-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하는 공부를 보고 있자면 속이 터집니다. 전자계산기와 컴퓨터의 등장이 예고된 상황에서 주산을 배우는 것과 같으니까요. (…) 그런데도 우리 아이들은 예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공부하고 있어요.

 과학혁명의 시대에 우리는 모든 것을 더욱 인간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독서도 글쓰기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포함한 공부도 스스로 인생을 설계하고 그 인생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수학 점수, 영어 점수를 따는 공부가 아니라 자신을 알고 남을 이해하고 서로 공감하면서 공존하는 인간이 되는 데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죠.

 암울한가요? 암울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그런 감정을 떨칠 수가 없으니까요.

 

- 페미니스트들은 남녀가 역할을 바꾸는 놀이를 성평등 교육 수단으로 활용합니다. 오해하실까봐 말씀드리변, 페미니스트는 '남자와 여자가 똑같이 존엄하다고 믿으며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질문하신 분은 어떤 체험을 하며 사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자녀 교육 때문에 질문하셨다면 학생부 기록을 의식하지 말고 자녀와 상의해서 다양한 삶을 체험할 기회를 주시라고 권합니다.

 

- 유시민의 《공감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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