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민의 소설 《불로의 인형》을 소개합니다.

소설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치밀'과 '재미'입니다.

이전 《궁극의 아이란 소설의 저자입니다.

제가 읽은 소설 중 최고로 재미있었습니다.

 

 

"휴대 전화 한 대를 팔면 얼마가 남는 줄 아나? 팔만 원이야. 그 휴대 전화를 만들기 위해 무려 삼천 명이 매달려. 삼천 명이 밤잠도 안 자고 지금까지 개발된 기술을 모두 쏟아붓는 거야. 그런데 이 종이 쪼가리 한 장에 수십억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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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통 인형극인 괴뢰희에 사용했던 인형이 아닌가 싶어."

괴뢰희는 영희影戱와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인형극 중 하나였다.

영희는 그림자를 이용한 인형극인 것에 반해 괴뢰희는 직접 조종하는 것으로, 막대를 이용해 움직이는 장두괴뢰杖頭傀儡와 실을 연결해 움직이는 현사괴뢰懸絲傀儡 등이 있다.

 "하지만 괴뢰희는 한나라 때가 시초라고 알려져 있잖아요."

 "자넨 고고학 공부할 때 기록에 없으면 실재하지 않는다고 배웠나?"

영감이 돋보기 너머로 힐끗 보며 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기록이라는 건 인류사라는 거대한 행성의 표피를 구성하는 작은 섬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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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라성 같은 기업 회장들의 그림을 감정해 주고 최고급 와인으로 입을 축이던 그가 싸구려 여인숙에서 정체 모를 여인의 교음을 듣고 있자니 엉뚱하게도 누군가의 명언이 떠올랐다.

 '인생은 3막이 고약하게 쓰인 조금 괜찮은 연극이다. 그리고 3막에서 주인공은 죽는다.'

누가 말했는지 떠오르진 않았지만 지금 가온에게 가장 와 닿는 문장이었다. 과연 내 연극에서 지금은 몇 번째 막일까. 만약 3막이라면 자신의 연극은 지독히 심통맞고 악의로 가득 찬 대본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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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누구에게도 심장을 온전히 내준 적이 없었다. 그것은 어머니를 보면서 터득한 일종의 자기방어 시스템이었다. 어머니는 사랑 때문에 인생을 망쳤고 평생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게 사랑이라는 감정의 문제점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얻게 된다 해도 오래 지속되지 않을뿐더러 만약 심장을 내주고도 손에 넣지 못하면 인생에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쓴맛을 봐야만 했다. 그것은 상당한 고통과 부수적인 손실을 감당해야만 하는 일종의 도박이었다. 게다가 경험상, 얻는 이보다 얻지 못하는 이가 확률적으로 더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그로 인해 생기는 지워지지 않을 상처였다. 시간이 지나면 아물긴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흉터처럼 트라우마가 남았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감정의 과소모이자 인생의 낭비였다. 가온은 관계가 진전되어 미묘한 감정 반응이 일어나면 본능적으로 발을 뺐다. 덕분에 그의 심장은 온전히 그의 가슴속에서 뛰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석화되었다. 마치 햇빛을 보지 못해 생기를 잃어 가는 해바라기처럼. 가온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인생에서 하나를 얻기 위해선 다른 하나를 내줘야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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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일연이 저술한 『삼국유사』「기이」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네.

 '원양국의 공주 연화가 이저국 보국 왕자와 혼인을 맺는데 성대한 결혼식 중 대진국에서 온 진강이라는 자가 나무와 가죽으로 사람을 만들어 가무를 하게 했다.'

(중략)

하지만 분명한 건 진강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는 거야. 창애에게는 여섯 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해. 염계, 현성, 석자촉, 수겸, 마운, 그리고 진강. 이 여섯 명의 제자들은 창애가 죽자 뿔뿔이 흩어져서 몇 명은 왜, 즉 일본으로, 또 몇은 한반도로 향했다고 전해져. (중략) 창애의 죽음 이후 창애의 인형을 나눠 갖고 흩어져. 진강은 그중 한반도로 향한 제자 중 한 명이야. 그러니까 『삼국유사』에 나오는 진강은 그의 후예로 인형극을 공연하던 집단을 지칭하는 거지. 곽독괴뢰란 한자어에서 꼭두각시란 말이 파생된 것도 이 시기야. 이렇게 일본과 한반도, 그리고 중국 본토로 흩어진 여섯 명의 제자들은 각기 스승에게 배운 기술을 전파하기 시작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인형극이었어. 그것이 지금까지 전해지면서 한중일의 전통 인형극이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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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같은 순간 서울 모퉁이의 한 사찰에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위해 삼천 배를 올리고 있었다. 증오라는 이름의 독을 촉에 잔뜩 바른 화살이 무지한 십 년 세월을 뚫고 도로 자신의 등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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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정영후는 휴대 전화를 덮고 말았다. 피붙이에게 닿지 못한 기계 뭉치가 숙연하게 고개를 숙였다. 꾹 참고 있던 구름이 요의를 참지 못하고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네가 날 이해할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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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석동 혼자가 아니었다. 배후에 누가 있었다. 그는 이제껏 나타나지 않은 새로운 인물이었다. 사건은 항생제로 막을 수 없는 슈퍼바이러스처럼 무차별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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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 씨. 누구 소개로 날 찾아오셨나?"

두툼한 눈두덩 사이로 바라보는 모습은 석탄과 당근이 꽂힌 눈사람을 연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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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몸속에 감정을 식히는 냉동고가 들어 있는 듯 늘 수준 이상의 냉정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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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조직 삼합회를 움직이는 보스는 키가 160센티미터도 안 되는 여인이었다. 원항적은 작지만 검고 윤기 있는 자갈처럼 단단했다. 무릎을 반듯하게 모으고 양손으로 찻잔을 받친 채 음미하던 그녀의 눈빛은 백만 년 동안 영하 수십 도 아래에서 성장한 빙산처럼 일말의 온기도 느낄 수 없었다.

 "보기보다 멍청하군, 정가온 씨."

오래된 감정이라는 장기를 제거한 듯 건조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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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계약을 했습니다. 여섯 번째 인형에 관해 알아내겠다고."

에노모토가 집요하게 추궁했다. 그는 예의가 바르고 패션 감각이 뛰어난 거머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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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온은 난류를 따라 이동하는 물고기 떼처럼 무리 지어 몰려가는 출근 인파 틈에서 자신을 쫓는 눈동자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시선을 주는 이는 없었다. 사람들은 오늘 벌어질 자신의 인생에 몰두한 채 직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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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입구에는 거대한 사천왕상이 양옆에 버티고 있었다. 비파를 연주하는 지국천왕과 칼을 빼 든 증장천왕이 눈을 부라리며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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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마시가 늦둥이를 쓰다듬듯 빈 잔을 만지작거렸다.

 "넌 네가 알고 있는 지식이 우주를 다스리는 법칙 중 몇 퍼센트나 된다고 생각하느냐. 인간이 얼마나 만물의 이치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가온은 대답할 수 없었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파먹는 작은 세포조차 어쩌지 못하는 하찮은 존재였다. 우주의 한 귀퉁이에 위치한 작은 행성을 떠나는 것은 물론이고 열 길 물속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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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급격하게 세상이 바뀌는 걸 좋아하지 않아. 특히 역사 같은 근본적인 것들이 그렇게 되는 건 더더욱 싫어하지. 내가 이걸 박물관에 기부를 한다 해도 역사학자나 정부는 공개하지 않을 거야. 이 중에는 들추고 싶지 않은 치부도 상당수 있거든. 역사는 태생부터 진실이 아니라 권력가가 보고 싶은 것을 보여 주는 거야. 일종의 엔터테인먼트지. 이 많은 책들 중 과연 몇 퍼센트가 진실일까. 10분의 1?"

 일리 있는 말이었다. 역사는 기록자의 관점과 이익을 위해 왜곡되고 있었다. 진실이라는 단어는 이제 진부라는 말과 일맥상통하게 된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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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멸이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았다……"

가온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지각 한번 않고 쌓은 공교육 지식이 한순간에 휴지 조각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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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숨기는 덴 숲이 제일이고 사람을 숨기는 덴 시장통이 제일이지."

가온은 담멸이 토용 속에 인형을 숨겼을 거라고 추측했다. 인형을 감추는 데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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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이탈리아산 대리석이 번쩍이는 로비에는 잭슨 폴록의 〈넘버6〉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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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불로초 따위가 있으리라 생각진 않겠지?"

"왜 없다고 생각하지?"

 회장이 인형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며 물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으니까. 모든 건 수명을 다하면 사라지게 되어 있어. 심지어 하늘의 태양도 언젠가는 사라진다. 그런데 약초 따위를 먹었다고 영원히 살 수 있을 리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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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건네준 건 권총이었다. 러시아제 토카레프 9밀리로 암시장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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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몰락하고 있네. 예전의 단결력이나 '잇쇼켄메이一生懸命' 같은 정신은 사라진 지 오래야. 나는 그 정신을 다시 살리려는 것뿐일세. 그래서 예전의 영광을 되찾고 싶은 것뿐이야."

 그의 연륜 뒤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야망이 비로소 본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군요. 예전의 교만까지 되찾게 될까 봐.""옛 정신을 찾게 되길 바랍니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군요. 예전의 교만까지 되찾게 될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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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고조고 간대부 창애지신위

창애의 신위였다. 이들은 변변한 벼슬도 없이 서복의 그늘 아래서 재능을 낭비해야 했던 창애를 위해 진나라 최고 품계인 '간대부'라는 직위를 붙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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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제 중 최고는 약제 자체가 아니라 약제를 오랜 기간에 걸쳐 섭생한 동물을 취하는 것이야. 동물의 몸 안에 약 성분이 체화되어 스스로 약 기운을 내뿜기 때문이지. 고로 약초를 정기적으로 섭생한 미물을 먹는 것이 최고의 치료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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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에도 어김없이 시체들이 즐비했다. 정신 나간 듯 홍등이 제자리를 돌고 있었는데 총알 구멍에서 새어 나온 빛이 무도장의 미러볼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요염한 불빛을 받으며 폐허를 터벅터벅 걷던 가온은 한 주검 앞에 멈춰 섰다. 원항적이었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분을 못 삭인 듯 누군가를 향해 총을 겨눈 채 죽어 있었다.

***

설아 역시 거침없이 가온을 맞았다. 두 사람은 세상의 멸망 한가운데 서 있는 유일한 인류처럼 격렬하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시간의 흐름을 포기하고 마비와도 같은 감정에 몸을 맡겼다.

***

"영원히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러자 가온이 대답한다.

"영원이란 건 없어.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만큼 행복할 순 있어."

가온의 말에 설아가 다시 활짝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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